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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조회 등록일
8 22기 교육생 후기 "위니캇 수업체험사례"(미러링에 관하여...) 살레시오상담실 841 1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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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날 위니캇 수업중에 ‘미러링(Mirroring)’에 관한 부분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탄생 때 환영해준 것처럼 그것과 같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엄마가 아이를 바라봐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책을 통해 웃는 얼굴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수업중에 수녀님이 해주신 깊은 설명으로 ‘내가 이것 하나만은 꼭 해야겠다’는 추진력에 시동이 걸렸습니다. 배운 내용 중에 가장 먼저, 그리고 꾸준히 실천한 것이 미러링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사연과 동기가 있습니다.

제가 대상관계부모교육을 받기 직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였는데,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두 아이들의 양육 스트레스로 내 영혼이 메마른 사막과 같이 느껴질 때였습니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없다보니 아이들에게 따뜻한 모성애를 어떻게 줘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줄 것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내가 아이들에게 웃는 얼굴로 대한 적이 하루에 채 몇 분도 안된다는걸 느끼게 되었고, 화가 나지 않은 일상의 얼굴표정도 항상 굳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메마르니 얼굴에도 당연히 그 결과가 드러난 거라고 봅니다. 이런 얼굴표정을 아이들이 매일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이 너무 가여워졌습니다. 저는 그걸 깨닫고 ‘이러면 안되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얼굴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웃어야 된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가슴에서 거부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얼굴에서 어렸을 적 엄마가 나를 보던 그 싸늘한 눈빛이 오버랩 되며 대물림 되는걸 보았습니다.

저는 ‘엄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엄마가 나를 싸늘한 눈빛으로 흘겨보고 서 계시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다른 눈빛을 생각해 보려 해도 똑같았습니다. 제 기억 속에 떠오르는 건 냉정하고 싸늘한 눈빛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릴적에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며 ‘엄마는 나를 싫어하는 구나. 네 형제 중에 왜 나만 엄마가 그렇게 볼까?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늘 저를 외롭고 슬프게 했습니다. 엄마가 저만 유독 흘겨보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린 시절 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언니보다 공부도 못하고, 울기도 잘해서 그렇다고 추측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추측이었지 이유를 몰라 답답한 마음이 컷던 것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저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성장기 내내 죽고 싶은 마음과 우울감에 싸여 지냈습니다. 사춘기 때는 항상 엄마에게 화를 달고 살았구요. 그래서 저는 따뜻한 눈빛이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수녀님 수업을 들으면서 참 좋았던 점이 수녀님의 포근한 얼굴에서 오는 평화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바라마지않던 따뜻한 엄마의 얼굴이었습니다. 수녀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수업을 들으러 다니면서 살레시오 수녀님들을 만나면 항상 웃는 낯으로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는 것도 제 마음 깊은 곳에 인상이 남았습니다. 살레시오 신부님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 저변엔 아이들을 친절하게 만나주신 돈 보스코 성인의 영성에 뿌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지금은 돈보스코 성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답니다.

또한 수업시간에 홀딩, 미러링만 잘 해도 아이가 변화된다는 말을 듣고는 ‘미러링이라도 반드시 해보자.’ 라고 다짐했습니다.

매일 징징거리는 둘째 아이(4세)에게 눈이 마주칠때마다 눈웃음짓기를 시작했습니다. 의식적으로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처음엔 제가 연기자가 됐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슬픈 상황에서도 웃어야하는 연기자 말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너를 환영한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눈에 담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노력했습니다. 다행인건, 일주일에 2~3번씩 수업을 받으니 집에서 아이만 키우며 있을때보다 아이들을 대할 힘이 났습니다.

얼굴을 볼 때마다 웃는 눈으로 보는 것이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쌓이다 보니 어느날은 제가 아이들을 볼 때 자동적으로 웃음짓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석달, 넉달이 지나고 둘째 아이와의 관계가 더 편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맨날 ‘엄마, 미워! 싫어!’만 입에 달고 다니던 둘째아이였는데 그 말이 서서히 뜸해졌습니다. 장난감 놀이에서도 엄마 로봇을 때려 누르던 둘째의 공격적인 놀이 행동이 어느날 돌아보니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 나 이제 항상 웃는 얼굴로 아이를 보네?’ 하고 느끼며 저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개인적으로 이냐시오 기도를 곁들여 배우게 되었습니다. 처음 묵상주제를 주시는데 탈출기33,11;12-14절 말씀이었습니다. 대충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친구에게 말하듯 얼굴을 마주 대하시고 모세와 이야기 하십니다. 이 백성을 데리고 올라가라 하시고 너는 내 눈에 든다고 하시는데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누구를 보내실지 알려 주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당신 눈에 든다면 누구랑 갈지 알려주세요. 그럼 제가 더 당신 눈에 들겠습니다. 하니, 주님께서 “내가 몸소 함께 가면서 너에게 안식을 베풀겠다” 는 내용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모세가 주님께 누구랑 같이 갈지 알려달라고만 청했을뿐인데, 청한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서 직접! 몸소 함께 가겠다고 하시니 모세가 너무 기뻐 날뛰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바닥과 벽이 있는 곳에서 눈코입도 없는 아주 조그만 모세가 어린아이처럼 기뻐 날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님이 옆에서 그런 모세를 쳐다보시는데 모세는 주님의 밝은 햇살 안에 있었습니다.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주님, 그리고 주님의 빛 안에 있는 모세, 그 장면이 너무 좋아서 계속 머물렀고 기도후 눈을 떴는데 어느 순간 제가 모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주님이 같이 가주신다니 너무 기뻐서 날뛰고 주님을 껴안고 하면서 정말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얼하든 주님은 항상 웃으시면서 저를 흐뭇하게, 따뜻하게 바라보고 계셨고 저는 주님의 그 빛 안에 있었습니다. 기도후 너무 행복한 느낌이었습니다.

다음날, 첫째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첫째가 신발도 거꾸로 구겨신고 복도 철문을 쿵쾅거리며 날뛰는 겁니다. 순간 옆집에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서 싸늘한 눈빛과 냉정한 말투로 ‘너 여기서 그런 행동하면 왜 안되지?’하며 한마디를 날렸습니다. 화가 가라앉지 않아 집 앞에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데 책을 꺼내들고 읽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제의 기도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이 나를 따뜻하게 동반해 주시던 그 눈빛과 그 빛 안에서 기뻐 뛰던 나...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주님은 한결같이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시던 그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를 쳐다봤습니다. 나에게서 몇미터 떨어져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그래.., 주님이 나를 흐뭇하게 바라봐 주시던 그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봐 줬어야 했는데... 아이가 잘못했을때도 따뜻한 눈빛으로 동반해주는게 부모의 역할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잘못을 사랑으로 보듬어주려는 나의 모습에서, ‘어제 기도중에 어린시절 엄마한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채워받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안쓰러워졌습니다.

어느날 이 주제로 계속 기도하던중에 ‘우리는 왜 아이들을 이렇게 안보고, 시험 98점짜리로, 색종이 접기도 잘 못하는 아이로, 신발도 똑바로 못신는 아이로 볼까? 왜 그 행위 때문에 야단치고 울고 웃고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차이는 시선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인간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슬퍼하면 같이 아파하시고, 그 사람이 좋아하면 같이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에 시선이 머무시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느낌에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겁니다.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언제나 바라봐 주시는 밝은 햇살 같은 눈빛!! 제가 하느님을 좋아하고 하느님 말씀을 따르려는 이유도 그런 조건없는 사랑을 주시니까 너무 좋아서입니다. 저는 그때, 아이들도 부모가 그런 사랑을 주면 저절로 부모를 좋아하고, 부모말을 들어주고 싶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으니 해야할 것을 자발적으로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대상관계부모교육에서 받은 모든 단편적 지식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구슬이 하나로 꿰어지는 때가 있다더니, 저에게도 말로만 듣던 그때가 왔습니다. 바로 가슴으로 아이들을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겁니다. 가슴으로 동반할 때 칭찬도 결과에 대한 칭찬이 아닌, 동반해주는 격려와 지지가 됨을 알았고, 가슴으로 동반할 때 공부해라 말하지 않아도 자발적 학습이 이루어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는 진리를 발견한 것 같아 너무 기뻤습니다. 성경 속에서 기뻐하던 모세가 살아나와 모세가 저라는 현실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수녀님께 배운 미러링을 안고, 기도 안에서 예수님의 눈빛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따뜻함을 담은 눈으로 배웅을 해주는데, 아이도 보조개를 보이며 웃어주었습니다. 제가 아이를 보며 웃으면 아이도 저를 따라 웃어줍니다. 어쩔때는 아이가 먼저 웃고, 제가 따라 웃어줍니다. 아이가 저의 미러링을 보고 따라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럴땐 아이의 환한 눈빛에서 저도 미러링 받는 느낌이 듭니다. 수녀님께 배운 미러링이 이렇게 삶속에서 순간순간 결실이 보여집니다. 항상 죄책감에 무거웠던 제가 또 자랑스러워집니다. 저의 자존감도 올라갑니다. 아이도 그렇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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